[김기헌의 관광 시론] 경주에서 글로벌 MICE의 미래를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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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헌 교수 / 영산대 관광컨벤션학과

경주는 대한민국 관광 역사의 뿌리이자 등대와 같은 존재다. 신라 천년의 숨결이 깃든 담장 없는 야외 박물관으로 불리는 이곳은 1970~80년대 국민들의 가장 찬란했던 신혼여행지이자 수학여행의 메카였다. 관광인들에게 경주가 지니는 역사적 무게감은 더욱 각별하다. 이곳은 대한민국 관광개발의 효시이자, 관광산업이 단순한 위락이 아닌 국가 기간산업으로 추진되었음을 증명하는 살아있는 현장이기 때문이다. 대다수 사람이 경주 개발을 단순한 고적 정비 수준으로 기억하지만, 그 이면에는 경부고속도로 건설과 포항제철 건립에 맞먹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치열한 관광입국의 의지와 집념이 응축되어 있다.
1971년 6월, 포항제철 고로 화입식에 참석한 후 경주를 들렀던 박 전 대통령은 경주의 무한한 가능성을 간파했다. 그리고 불과 한 달 뒤인 7월17일, 대통령이 직접 대형 용지 위에 연필로 공간배치를 그려가며 A4 용지 4장 분량의 경주개발계획 작성지침 원안을 자필로 완성했다. 국가 수장이 관광단지의 공간구조와 추진 방향을 직접 스케치한 사례는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어렵다. 국운을 바꿀 거대한 프로젝트의 시작이었다. 국가의 명운이 걸린 만큼 추진속도는 긴박했다. 실무 부처의 종합기획과 보고, 그리고 대통령의 최종 결재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이 단 하루 만에 일사천리로 전격 마무리되었다. 지체할 시간이 없다는 국가 지도자의 강력한 결단력이 작용한 결과였다.
이후 정부는 한국관광공사를 주축으로 세계은행(IBRD)으로부터 1,282만 달러라는 거액의 차관 자금을 전격 도입했다. 전체 투자액의 31%를 차관으로 충당하는 과감한 금융전략이었다. 1975년 정부는 보문단지 마스터플랜을 바탕으로 종합 리조트 건설에 총력을 기울였다. 박 전 대통령은 공사기간 중에도 수시로 헬기를 타고 경주 현장을 직접 찾아 진척 상황을 점검하며 실무자들을 독려했다. 마침내 1979년 4월6일, 인공호수인 보문호를 중심으로 5개의 특급호텔군과 대중골프장, 쇼핑 및 위락시설을 완벽히 갖춘 대한민국 1호 관광단지, 경주보문관광단지가 그 장엄한 문을 열었다. 이는 선진국형 복합 리조트의 전형을 국내 최초로 제시한 사건이자, 1984년 제주중문단지 건설로 이어지며 대한민국 관광산업의 단단한 기초를 다진 위대한 역사적 전환점이었다.
반세기에 가까운 세월 동안 대한민국 관광의 중심축 역할을 해왔으나, 솔직히 지난 수십 년간 경주를 바라보는 전문가들의 시선에는 늘 깊은 아쉬움이 교차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독보적인 문화유산 콘텐츠를 보유하고 있으면서도, 경주의 관광생태계는 다분히 폐쇄적이고 경직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시대적 흐름을 읽지 못하는 아이디어의 부재, 그리고 문화재 보존이라는 명목에 가로막힌 규제 중심의 패러다임은 경주를 박제된 채 매력을 잃어가는 아날로그 관광지로 머물게 만들었다는 지적을 피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지난 4월, APEC 정상회의 개최 이후 진행된 관광전문가 경주 팸투어는 나에게 거대한 충격과 새로운 희망을 안겨주었다. 경주는 말 그대로 상전벽해의 진화를 이루어내며, 국제관광 목적지로서 손색없는 면모를 과시하고 있었다. 과거 어둠에 묻혀있던 보문호수 일대는 신라 황실의 유산을 모티브로 한 현대적 미디어파사드와 경관조명을 통해 밤이 더 화려한 체류형 야간관광의 허브로 변모했다. 거장 승효상의 건축과 박대성 화백의 예술이 자연과 공존하는 솔거미술관은 품격 높은 아트 투어리즘의 정수를 보여주었고, 신라 설화를 고화질 VFX 기술로 구현한 국내 최대 규모의 실감형 미디어아트 뮤지엄 ‘플래시백 : 계림’은 경주를 첨단 헤리티지 테크시티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이처럼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대전환을 완벽히 마쳤음에도 불구하고, 글로벌 고품격 관광MICE 중심지로 완전히 안착하기 위해 시급히 도려내야 할 해묵은 과제들도 명확히 보였다. 가장 시급한 것은 보문단지 주변에 흉물처럼 방치된 개별 이동수단(모빌리티)의 정비다. 고도의 미관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잡한 디자인의 바이크나 스쿠터들은 도시의 격조를 떨어뜨리고 있다. 이는 경주의 역사적 경관과 조화를 이루는 친환경 디자인 공공 모빌리티 시스템으로 조속히 전환되어야 한다. 아울러 글로벌 비즈니스 여행객과 외래관광객을 품을 수 있는 경주시민들의 적극적인 환대 정신과 글로벌 서비스 마인드의 정착, 그리고 KTX 신경주역과 인근공항에서 보문단지까지 막힘없이 연결되는 지능형 교통 체계 확충을 통한 접근성 개선은 여전히 해결해야 할 숙제다. 또한, 이토록 훌륭한 융복합 콘텐츠와 첨단 인프라를 구축해 놓고도 효과적인 통합 마케팅과 대외홍보가 부족해 평일 보문단지가 한산한 모습을 보이는 점은 참으로 뼈아픈 대목이다.
50년 전, 국가원수의 뚝심과 철저한 계획하에 국가 기간산업으로 잉태된 경주보문관광단지는 이제 APEC이라는 위대한 도약을 통해 역사와 첨단 기술이 공존하는 글로벌 관광MICE 허브로 거듭났다. 화려한 하드웨어 위에 세련된 디테일과 글로벌 수용 태세, 그리고 전방위적 디지털 마케팅 전략을 조화롭게 입힌다면, 천년고도 경주는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인이 영감을 얻어가는 진정한 문화적 중심지로 우뚝 설 것이라 나는 확신한다.
출처 : 여행신문(https://www.traveltimes.co.kr/news/articleList.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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